오마르 하이얌(1048년~1131년)은 페르시아의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이며 시인입니다. 시와 수학이라는 다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장르를 섭렵한 오마르 하이얌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오마르 하이얌의 생애와 일화
오마르 하이얌은 이란의 북동부 지역인 니샤푸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이맘 모와파크라는 학자의 제자가 되어 과학, 철학, 수학, 천문학 등을 배웠습니다. 이때 하이얌은 니잠과 하산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후에 성공을 하게 되면 부와 명예를 똑같이 나누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시간이 흘렀고 가장 먼저 성공한 사람은 니잠이었습니다. 니잠은 술탄(이슬람 국가의 군주)의 국무대신이 되어 하이얌과 하산에게 고위직을 제안하며 약속을 지켰습니다. 니잠의 후원으로 하이얌은 이스파한에서 천문학과 수학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니잠이 하산에게 암살되는 일이 일어나고 하이얌은 메카로 순례 여행을 떠났습니다. 순례에서 돌아온 후에는 궁정의 점성가로 일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이얌은 당대에 수학자로서 천문학자로서 확고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인으로서의 명성은 극히 미미하였습니다. 하이얌이 죽은 지 700년 뒤인 19세기에 페르시아어를 배운 영국의 시인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에 의해 영어로 번역된 「루바이야트」라는 시집이 발간되었습니다. 무려 1000여 편에 달하는 시가 담긴 「루바이야트」에는 자유주의와 합리주의, 현세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않고 술과 꽃, 노래와 미녀를 사랑하며 현재를 즐기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졌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라파엘 전파 화가들에게 호응을 얻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즐거웠던 친구들은 모두 가 버리고
차례로 죽음이라는 것에 그들을 짓밟히네
우리의 인생이라는 대향연에 있었지만
그들은 우리들 주변에서 만취해 있었네.

오마르 하이얌의 수학이론과 업적
하이얌은 3차 방정식을 1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모든 유형의 3차 방정식에 대해 기하학적으로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그가 정리한 3차 방정식의 14가지 유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중 4가지는 다른 수학자들에 의해 증명되었었고 하이얌은 증명되지 않았던 10가지 유형을 기하학적 방식으로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음수의 개념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삼중근이나 서로 다른 세 개의 근을 갖는 것을 생각할 수는 없었고 오로지 양수의 범위 안에서 근과 계수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얌의 저서가 높은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3차 방정식이 1개 이상의 근을 가질 수 있음을 최초로 증명했으며 자와 컴퍼스를 사용한 작도법만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이얌은 유클리드 기하학 원론을 분석하여 유클리드 평행선 공준을 증명할 수 있는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평행선 공준을 대체할 8개의 명제를 제시하기도 하였는데 이 중 2개는 베른하르트 리만과 니콜라이 로바쳅스키의 비유클리드 기하학 발견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 밖에도 이항식의 네제곱 이상의 거듭제곱을 전개하는 법칙을 발견했고 파스칼의 삼각형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이얌은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1074년 8명의 천문학자들과 함께 만든 잘라르력이라 불리는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이 달력은 그 시대의 어떤 달력보다도 정확하게 1년의 길이를 측정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태양력이었던 잘라르력은 실제 사용되지는 못했지만 천문학적인 면에서는 그레고리력보다도 더 정확하여 3777년에 단 하루의 오차만이 있다고 합니다.
오마르 하이얌의 영향과 의의
오마르 하이얌은 전 세계의 수학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수학 발견을 했습니다. 유클리드의 평행선 공준에 대한 그의 추론 방법을 제시하였고 기하학 연구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여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하이얌은 「대수학」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당시 이 책은 다른 나라 말로 번역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수학자들은 하이얌이 여러 가지 발견을 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똑같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노력해야 했습니다.
시인이기도 한 하이얌은 「루바이야트」의 시를 통해 후세의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페르시아인이지만 특이하게 무신론자였던 그는 당시에는 호응을 받지 못했습니다. 강한 현세주의, 쾌락주의, 회의주의적 성향이 동시에 드러내어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공감받기 힘들었지만 현대의 다양한 관점이 더해지면서 1960년대 히피즘의 대두 때 주목을 받았고 그레이트풀 데드 등의 록 밴드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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