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년 ~ 1954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암호 '에니그마'를 해독해 연합군을 구한 수학자로 유명하며 이 이야기는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더 유명해졌습니다. 현대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리는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앨런 튜링의 유년기와 청년기
앨런 튜링은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미적분에 대한 초보적 지식도 없이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었습니다. 13살 때 처음으로 수학적 연구 결과를 도출했는데 그것은 역탄젠트 함수의 무한한 연속을 어림잡을 수 있는 계산 형식으로 그리 독창적이진 않았지만 이후 그의 연구의 전체적인 방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6살에 친구 크리스토퍼 모컴을 만나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둘은 힘을 합쳐 복잡한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모컴이 결핵으로 죽자 앨런 튜링은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형이상학적 주제는 미래에 그가 컴퓨터를 연구할 때 영향을 주게 됩니다.
18살이 된 앨런 튜링은 케임브리지 킹스 대학에 입학해 수학을 공부합니다. 그는 확률론과 통계학을 공부하면서 천재 물리학자인 에딩턴 경의 과학방법론 강의를 듣게 됩니다. 앨런 튜링은 이 강의의 오류를 잡기 위해 '중심 극한 정리'라고 알려진 기본 정리를 수학적으로 증명해 냅니다. 이미 12년 전 수학자 린드버그가 증명한 내용이었지만 킹스 대학은 튜링을 연구교수로 선임합니다. 계속해서 튜링은 1935부터 1937년까지 결정 가능 문제를 연구했습니다. 힐베르트의 난제 중 '어떤 수학적 명제의 증명 가능 여부를 알 수 있는 알고리즘이 과연 존재할까?'라는 질문에 수학자 괴델은 증명할 수 없는 수학적 명제가 존재함을 증명해 냈습니다. 앨런 튜링은 그와 같은 알고리즘도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했습니다. 이런 증명이 실린 논문[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 문제의 응용에 대하여]은 컴퓨터의 근본적인 디자인을 최초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상의 연산 기계인 튜링 기계입니다. 24세의 청년 앨런 튜링이 만든 이 튜링 기계는 20세기 과학사의 10대 사건에 들어갈 만큼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튜링기계를 만들다
튜링 기계는 총 5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칸으로 이루어진 테이프와 테이프에 기록되는 기호들, 그 기호를 읽거나 쓰는 장치들, 그 장치의 상태들, 기계의 작동 규칙표가 바로 그것입니다. 튜링 보편만능기계라고 불렀던 이 궁극의 기계는 현대 컴퓨터에 그대로 구현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튜링 기계에 내장된 테이프는 메모리칩으로 테이프에 읽고 쓰는 장치는 메모리칩과 입출력 장치로, 기계의 작동 규칙표는 중앙처리장치(CPU)로 발전했습니다.

앨런 튜링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 박사 과정을 밟습니다. 이때 프린스턴 교수인 존 폰 노이만과 친분을 쌓게 됩니다. 1938년 튜링은 기존의 튜링 기계를 보강한 하이퍼 계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 논문은 다른 수학자들의 연구에 영향을 줄 정도로 파급력이 컸습니다. 계속해서 리만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리만-제타 함수의 값'을 기계적으로 구하는 연구를 한 끝에 [제타함수의 계산방법]을 발표합니다. 박사 학위를 받은 튜링은 미국에 남으라는 존 폰 노이만의 권유를 받았지만 조국 영국으로 돌아가 '리만-제타 함수의 값'을 계산하기 위한 특수목적의 아날로그 컴퓨터를 제작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이 연구는 중단되게 됩니다.
전쟁의 한가운데 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을 전쟁의 한가운데로 불러냅니다. 바로 암호해독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독일은 '에니그마'라는 암호기계를 사용했는데 이는 3개의 회전축과 26개의 플러그판을 이용해 알파벳 숫자들을 뒤섞어 1조 개 이상의 암호문을 만들어내는 기계입니다. 튜링은 몇 주가 걸리던 암호 해독을 몇 시간으로 단축시켰습니다. 이는 봄베라는 기계를 튜링이 고안했기에 가능했습니다. 봄베는 독일의 암호를 해독해서 전황을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봄베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튜링 테스트
전쟁이 끝난 후 튜링은 국립물리학 연구소를 거쳐 맨체스터 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컴퓨터 개발을 이어나갔습니다. 생각하는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 목표였던 튜링은 신경학과 생리학을 공부하며 정확한 정보가 구현되는 컴퓨터 설계를 연구하며 튜링 테스트라고 알려진 인공지능 컴퓨터 테스트를 제안합니다. 이는 컴퓨터가 인간처럼 반응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입니다. 서로 다른 방에 있는 상대방에게 키보드로 질문하고 답변을 들은 뒤 상대방이 인간인지 컴퓨터인지를 결정한다는 튜링 테스트를 발표하며 앞으로 50년 뒤에는 비약적으로 발달한 컴퓨터에게 보통 사람들이 질문을 해서 5분 안에 사람인지 컴퓨터인지 판단해 맞출 확률이 70%가 넘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앨런 튜링의 연구는 인공지능과 발생학이라는 복합수학으로 발전했지만 순수 수학 분야에 대한 관심도 계속되어 [리만-제타 함수에 대한 계산] 등의 논문도 발표했습니다.
야만의 시대에 살다
앨런 튜링은 동성애자였습니다. 폰 노이만은 동성애가 범죄가 되는 영국보다는 자유로운 미국에 머물기를 바랐지만 앨런 튜링은 영국으로 돌아와서 전쟁을 승리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 당시의 영국은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1952년 영국은 튜링을 성문란 혐의로 고소하고 화학적 거세라는 선고를 내립니다. 또한 튜링의 컴퓨터연구소 부소장직을 해임합니다. 1년여 동안의 호르몬 치료로 그는 피폐해졌고 1954년 청산가리 흡입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41세였습니다. 이후 앨런 튜링은 잊혀졌고 1974년 프레더릭 윌리엄 윈터보섬이 『울트라의 비밀』이라는 책을 내면서 튜링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2013년 튜링 복권 청원이 접수되어 여왕 특별 사면령으로 튜링은 사후 59년 만에 공식적으로 복권됩니다. 2021년 6월부터 발행되는 새 파운드 스털링 50파운드 신권에 앨런 튜링의 초상이 사용되기로 확정됩니다. 반세기 만에 그의 명예가 회복된 것입니다.


앨런 튜링의 영향과 의의
앨런 튜링은 수학, 암호학, 생물학 등 많은 분야의 다양한 연구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수학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컴퓨터라는 도구를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컴퓨터 개발 연구를 하면서도 [리만-제타 함수]에 대하여 끊임없는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가 오늘날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분야는 전산학, 특히 컴퓨터 분야입니다. 튜링 테스트 등은 아직도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를 컴퓨터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컴퓨터 분야에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튜링상'이 제정되어 1966년부터 수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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