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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이야기

정체를 숨기고 공부한 여성 수학자, 소피 제르맹

by 마늘빵12 2023. 9. 9.

소피 제르맹(Sophie Germain, 1776년 ~ 1831년)은 히파티아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여성 수학자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본인의 이름이 아닌 '르 블랑'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수학자 제르맹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수학에 매료된 소녀

제르맹은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자 프랑스 혁명기에는 국민의회 부의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격동기였으므로 수줍음이 많던 제르맹은 조용한 곳이 필요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서재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진 제르맹은 많은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13살이 되던  해에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고 파리 코뮌이 구성되었습니다. 파리는 혁명주의자나 무정부주의를 내세운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났고 제르맹은 안전을 위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그녀는 더욱 책에 빠져들었습니다. 그중에서 제르맹의 마음을 빼앗은 이야기는 바로 아르키메데스의 이야기였습니다. 몽튀시아가 쓴 『수학의 역사』에 쓰인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무례한 로마 병사의 손에 죽음을 당하던 순간에도 기하학 문제에 몰두했다는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르키메데스가 가장 순수한 수학이라 여겼던 기하학에 열중했다면 수학은 배워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수학에 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는 수학은 여성이 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고 여성인 제르맹이 상류층 여성에게 필요한 교양 정도만 익히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제르맹이 수학 공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서재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제르맹의 열정을 쉽게 식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모님이 잠이 들면 담요로 몸을 돌돌 말고 서재로 가서 촛불 하나에 의지하여 공부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어느 날 제르맹이 밤새 책을 보다가 피곤한 나머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얼어붙은 잉크와 계산이 잔뜩 적힌 석판을 두고 몸이 언 채로 잠들어 있는 제르맹을 발견한 부모님을 더 이상 제르맹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의 수학 공부를 허락하였습니다. 

 

 

소피 제르맹의 다른 이름 '르 블랑'

1794년 프랑스에서 과학기술의 최고 교육기관인 에콜 폴리테크닉이 세워졌지만 오로지 남성을 위한 학교로 여성은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 직접 다닐 수는 없지만 제르맹은 강의 노트를 모아서 공부를 했습니다. 특히 당시 최고의 수학자 중 한 사람인 라그랑주의 해석학 강의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강의였습니다. 제르맹은 자신의 공부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여 과제물로 제출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이름이 아닌 '르 블랑'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과제물 보고서를 본 라그랑주는 그의 독창성과 창의성에 놀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르 블랑'이라는 학생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라그랑주는 '르 블랑'을 찾았고 그가 남성이 아닌 여성 소피 제르맹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라그랑주는 직접 제르맹의 집에 찾아가 그를 유망한 수학자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1798년 제르맹은 르장드로의 『수론』을 읽고 몇 가지 문제점을 적어 편지를 보낸 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문제를 연구하였습니다. 르장드로는 제르맹을 공동연구자라고 생각하여 『수론』2판에 그가 발견한 사실을 부록에 실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제르맹은 연구를 계속 이어나갔지만 당시 사회는 여전히 여성들이 공식 교육을 받을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성 중심 사회의 높은 벽과 여전히 싸우면서 수학자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가우스와의 서신 교환

1801년 독일의 수학자 가우스가 『산술연구』를 출간했습니다. 제르맹은 그 책을 여러 번 읽은 후 자신의 생각을 몇 가지 담아 가우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역시 소피 제르맹이 아닌 '르 블랑'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대한 내용이었고 가우스는 흥미를 가지고 답을 했으며 그 후로 수학에 대한 의견을 편지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프러시아 전쟁이 일어나고 제르맹은 가우스의 안전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는 친척인 페르네티 장군에게 가우스의 안전을 부탁했고 이를 계기로 가우스는 '르 블랑'이 남성이 아닌 여성 소피 제르맹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우스는 깜짝 놀랐으나 '그녀야말로 가장 숭고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며 극찬을 했고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계속되었습니다. 

제르맹이 가우스에게 보낸 편지

 

 

19세기 히파티아

가우스가 수론에서 다른 분야로 관심이 넘어가면서 제르맹과의 서신 교환도 끊어지게 됩니다. 이 무렵 제르맹은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바로 탄성체에 대한 연구입니다. 하지만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거나 당대의 수학자들과 토론을 하려고 하면 여성이라는 이유는 참여의 제한이 많았습니다. 탄성체 연구에 대한 공개경쟁시험에 참여한 제르맹은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방정식으로 도출해 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평가단은 여성에게 상을 줄 수 있느냐는 문제로 논란을 벌이다 결국 그에게 대상을 주었습니다. 이는 과학 아카데미가 여성에게 상을 주는 처음의 사례였습니다. 상을 수상한 후 제르맹은 과학아카데미의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1820년대에 들어와서 제르맹은 자신의 연구를 좀 더 정교화하였습니다. 이 성과들은 1930년에 『표면 곡선에 관한 연구』로 출간되었고 이듬해 마지막 논문이 출간되는데 이것이 그의 가장 독창적인 연구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평균 곡률의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제르맹은 5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수학과 과학 연구가 전부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제르맹은 고대의 전설적인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에 빗대어 19세기 히파티아로 불리기도 합니다. 

 

 

제르맹의 수학이론과 업적

제르맹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소수로 소피 제르맹의 소수가 있습니다.

암호학에서 RSA 암호와 관련하여 p와 2p+1이 모두 소수일 때, 2p+1를 안전한 소수라고 합니다. 이는 제르맹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인데 제르맹은 완전하지 않지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일부 증명한 수학자입니다. 

 

그 외에도 표면 탄성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에펠탑 건립 당시 금속의 탄성 연구에 공헌한 수학자난 과학자들을 명판에 새겨놨었는데 소피 제르맹의 이름만 빠졌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제르맹의 영향과 의의

제르맹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일부 증명한 수학자로 후대 수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현재 소피 제르맹은 프랑스에서 추앙받는 수학 천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파리에는 소피 제르맹 거리가 있고, 에콜 소피 제르맹이라는 학교도 있습니다. 그 학교에는 '독립적 존재'라고 쓰여있는 그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면 그의 이론이 더욱 정교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하지만 여성 수학자, 여성 과학자를 용납하지 않았던 시대에서 그는 거의 혼자 힘으로 성과를 냈던 독립적인 수학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