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바리스트 갈루아(Evariste Galois, 1811년 ~ 1832년)는 군(群)의 개념을 처음으로 고안한 수학자입니다. 21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아벨과 많이 비교되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 갈루아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갈루아의 어린 시절
갈루아는 프랑스 파리 근처인 부르라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학교의 교장이었고 시를 짓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당시는 프랑스 혁명기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공화주의자였고 루이 18세가 왕위에 복원된 1814년에는 부르라렌의 시장이 되었습니다. 갈루아는 12살 때까지 어머니에게 그리스어 라틴어 등을 배웠습니다.
프랑스 혁명기에 태어나고 자라며 공화주의자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갈루아는 학창 시절 혁명가를 꿈꾸며 왕정에 대항하다가 학교에서 징계를 받기도 합니다. 학업 초기에는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던 갈루아는 학업에 흥미를 잃었고 갈수록 성적이 나빠져 재수강하는 경우도 흔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기하 수업을 듣게 된 갈루아는 기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르장드르의 『기하학』을 며칠 만에 읽으면서 처음 읽자마자 내용을 숙지했다고 합니다. 라그랑주 등의 전문 수학 서적을 읽게 된 갈루아는 학교의 평범한 수학 수업이 갈루아에게는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떨어지다
갈루아는 당시 최고의 학교인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지원했지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종이에 계산을 하지 않고 암산을 하는 습관이 있는 갈루아는 답안지에 풀이 과정을 쓰지 않고 암산으로 계산하여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쉽지만 갈루아는 다시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지원했습니다. 당시에는 두 번의 기회가 주워졌기 때문에 갈루아에게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갈루아의 아버지가 반대파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은 갈루아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급진적인 공화주의자가 된 계기가 됩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입학시험을 보게 된 갈루아는 결국 불합격되고 맙니다. 입학 구두시험에서 면접관들의 무능함을 비웃어 면접에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수학 이외의 과목은 낙제점을 받아 입학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갈루아는 에콜 프레파라투아르에 입학하게 됩니다.
계속되는 불운
1829년 갈루아는 첫 번째 논문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회원인 코시에게 보냈는데 그는 갈루아의 논문을 구두로 아카데미 모임에서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건강이 나빠져 미루다가 아예 잊어버립니다. 갈루아는 다시 논문을 보냅니다. 이번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로 보냅니다. 논문의 심사는 푸리에가 맡았는데 심사하던 도중 사망하면서 논문은 사라지게 됩니다. 마음을 다잡고 갈루아는 세 번째 논문을 보냅니다. 심사자는 푸아송이었는데 그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논문 심사를 거절합니다. 이 세 편의 논문에는 5차 방정식의 해법에 대한 연구가 담겨있었습니다. 처음에 갈루아는 5차 방정식의 해법을 찾았다고 생각했으나 검증 과정에서 5차 이상의 방정식은 대수적 방법으로도 풀 수 없음을 즉, 공식이 없음을 확신하고 이를 증명해 냈지만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과격한 공화주의자가 된 갈루아는 감옥에 수감됩니다. 감옥의 갈루아에게 푸아송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갈루아의 논문이 설명이 부족하고 난해하며 증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써서 제출할 것을 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갈루아는 이 권고를 받아들여 세 번이나 고쳐냈지만 같은 이유로 거절당하게 됩니다. 갈루아는 깊이 좌절하게 됩니다.
결투로 세상을 떠나다
당시 콜레라가 창궐하자 프랑스 정부는 재소자들을 석방합니다. 가석방된 갈루아는 석연찮은 이유로 1832년 5월 30일 아침에 결투를 하게 됩니다. 갈루아는 오른쪽 복부에 총상을 입어 다음날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곁에는 동생 알프레드가 지켰는데 울먹이는 알프레드를 위로하며 갈루아는 '그렇게 울지 마라. 스무 살에 죽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용기를 냈는데...'라고 말합니다. 그의 장례식은 2000여 명의 인파가 몰려 젊은 수학자이자 혁명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결투가 있기 전 날 밤에 갈루아는 위대한 업적을 남깁니다. 급하게 휘갈기듯 써 내려간 것은 방정식 이론과 적분함수, 그리고 세 가지 미발표 논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는 자료와 편지를 친구 슈발리에에게 남겼고 자신의 논문을 가우스와 야코비에게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 후 11년 동안 갈루아의 형과 슈발리에는 많은 수학자들에게 갈루아의 연구 논문을 보냈습니다. 이를 받은 수학자 중 조제프 리우빌은 그 가치를 알아보고 갈루아의 특이한 용어와 표기법을 연구해서 증명 과정에서 누락된 단계를 넣어 1843년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소개했습니다. 또한 1846년 갈루아의 발표된 논문 5개와 결투 전날 기록한 편지, 미발표 논문을 종합하여 67쪽의 갈루아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드디어 갈루아의 연구가 빛을 보기 시작한 순간입니다.

갈루아의 수학 이론
결투 전 날 갈루아가 친구 슈발리에에게 남긴 편지에는 타원 적분과 대수 함수의 적분, 5차 방정식 해의 존재 가능성을 증명하는 군론이 적혀 있는데 이를 '갈루아 이론'이라고 부릅니다. 군(群)은 수의 집합이 가지는 성질 가운데 최소한의 것만 가지도록 한 추상적인 대상의 집합을 말합니다.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집합의 원소 사에에 덧셈과 같은 연산이 행해져 나온 결과도 그 집합의 원소가 되면 그 집합을 군으로 묶을 수 있으며 이는 추상대수학의 하나이다.
아벨이라는 수학자는 대수적인 풀이 방법인 근의 공식을 가지고는 5차 방정식을 풀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어떤 경우에 방정식이 대수적으로 풀어지고 어떤 경우에 방정식이 대수적으로 풀어지지 않는지를 알아내는 일은 무척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군론은 이 물음을 풀려고 노력했던 갈루아가 제시한 풀이 방법입니다. 갈루아는 군론을 이용해서 다항 방정식의 대수적 해법에 대한 일반적인 관계를 증명했습니다. 아는 수학사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군론은 매우 어려운 학문이기 때문에 지금도 군론을 연구하는 수학자들은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갈루아의 영향과 의의
갈루아의 이론은 기하학이나 결정학, 그리고 대수학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지금도 핵물리학과 유전공학의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갈루아는 되도록 기호나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자세는 지금도 여러 수학자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짧은 생을 산 갈루아는 비슷한 시기의 노르웨이의 수학자 아벨과 많이 비교됩니다. 후대의 사가들은 '아벨은 가난이 죽였고, 갈루아는 온 세상의 바보들이 학살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시대를 앞서간 혁명주의자이자 수학자인 갈루아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수학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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