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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이야기

원자력 산업에 영향을 준 수학자, 어니스트 윌킨스 주니어

by 마늘빵12 2023. 10. 4.

어니스트 윌킨스 주니어(Ernest Wilkins Jr.  1923년 ~ 2011년)는 임의의 다항식이 '0'이 되는 것에 대해 연구했으며 감마선에 투과를 차단하기 위한 차폐의 개발에 도움을 준 수학자입니다. 어니스트 윌킨스 주니어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천재 소년 어니스트

어니스트 윌킨스 주니어는 1923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미국 흑인의 전문가 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50년대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차관보를 맡기도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시카고 전문학부의 교재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윌킨스는 태어난 지 13개월 때 알파벳을 다 외웠고 5살이 되기 전에 사칙연산을 할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IQ를 측정했는데 그 수치가 163으로 나왔는데 이는 천재로 분류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7살 때는 블랙잭이라는 카드 게임을 마스터했고 활동적인 것도 잘해서 지역 탁구대회에 나가 우승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학교 성적은 당연히 우수했고 13세에 시카고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시카고 대학 역사상 최연소 입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 수학회에서 주관하는 전국수학경시대회에서 상위 10명 중 한 명으로 뽑히기도 합니다. 16세의 윌킨스는 대학을 졸업하고 수학과 학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42년 19세가 된 윌킨스는 수학과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는 아프리카계 미국 흑인으로서는 여덟 번째였습니다. 

 

그 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위원을 하였고 터스키기 대학교의 수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강의를 하면서 미분방정식, 고급해석학, 질병의 확산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들과 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도 함께 진행해 여러 수학 저널에 논문을 기재하였습니다. 

 

 

교수직을 떠나 과학자이자 공학자로 

2~3년의 짧은 연구직과 교수직을 뒤로하고 윌킨스는 26년 동안 산업체에서 일하거나 정부가 보조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1944년부터 1946년까지 윌킨스는 광석에서 금속을 골라내는 방법이나 기술을 연구하는 시카고 대학의 야금술 연구소에서 물리학자로 일했습니다. 이곳에서 우라늄을 방사성 플로토늄으로 바꾸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윌킨스는 방사성 물질을 만들어내는 기기를 냉각시키기 위한 방법을 개발하는 연구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야금술 연구소에서 그는 강력한 핵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미 정부의 프로그램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부서에서 일했습니다. 윌킨스는 핵분열성 핵물질의 추출을 연구했고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에 자신의 연구팀의 최종 목표에 대해서 들었다고 합니다. 

 

1946년 미국 광학협회의 회원이 되어 4년 동안 수학자로서 우주탐사 망원경을 설계하는 작업을 도왔습니다. 정교한 렌즈의 설계에 필요한 원뿔의 절단면과 관련된 여러 곡선들에 대한 지식과 함께 기하학과 물리학에 대한 높은 수준의 지식들이 요구되었는데 윌킨스가 적임자였습니다. 그는 함수론, 기하학, 미분방정식, 고급해석학의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면서 연구를 했습니다. 

 

 

핵반응의 평화적 활용을 위한 연구

월킨스는 20여 년 동안 핵반응의 평화적 활용을 위한 개발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윌킨스와 동료 허버트 골드스타인은 핵분열 과정에 대해 공동연구를 했습니다. 일련의 실험을 통해 고에너지 감마선이 모든 물질이 아닌 몇몇 물질만을 통과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것은 원자로의 설계에 매우 중요한 내용이 되었고 핵반응에 의해 만들어지는 감마선과 다른 고에너지 입자들로부터 우주 비행사들과 그 장비를 보호하는 차페를 개발할 때 상당히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방사선 동위원소 차폐시설

또한 원자력 엔진의 냉각에 관한 연구도 진행하였습니다. 핵반응은 상당량의 열을 발생하지만 엔진에 열을 흡수하거나 소산시키는 피트싱크로 알려진 금속핀을 부착시키면 열은 엔진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됩니다. 윌킨스는 수학 지식을 활용하여 엔진에 가해진 열을 흡수하는 핀의 모양을 결정했습니다. 

 

1984년에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야금술 연구소가 명칭을 바꾼 아르곤 국립연구소의 초빙 과학자로 지냈습니다. 윌킨스가 이 연구소에서 수행한 연구는 미국 에너지국의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산업계에서 다시 학계로

1970년 윌킨스는 하워드 대학교의 응용 수리물리학과 교수로 학계로 돌아옵니다. 그는 흑인들이 수학을 더 많이 공부할 수 있도록 힘써서 1976년 하워드 대학교는 수학과에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과정을 개설하여 첫 번째 HBCU(흑인이 다니는 대학)가 되었습니다. 1985년 윌킨스는 퇴직했지만 5년 후 조지아에 있는 클라크 애틀랜타 대학교의 응용수학과 수리 물리학 교수로 임용되어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는 일생을 바쳤던 과학과 공학 분야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학적 지식을 활용할 것을 학생들에게 당부했습니다. 2003년 79세가 된 윌킨스는 퇴직하여 시카고의 고향으로 되돌아갑니다.

 

 

흑인 인종차별의  표적

흑인인 윌킨스는 종종 인종차별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고등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을 했지만 대학의 교수 자리는 구하지 못했습니다. 흑인 교수를 뽑고자 하는 대학은 HBCU(역사적으로 흑인만이 다니는 대학)으로 알려진 남부의 몇몇 대학들뿐이었습니다. 이 대학들 중 터스키기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수행하였습니다.

 

1947년 미국 수학회의 회의에 참석하여 인종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인해 백인 수학자들과 같은 호텔에 머물 수 없었으며 레스토랑에서 같이 식사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대신 대학교 근처의 흑인 가족과 함께 지내며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윌킨스는 회의 참석을 취소하고 몇 년 동안 남부 여러 대학교에서 개최하는 학회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1970년 학계로 다시 돌아온 윌킨스는 흑인 학생들이 수학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있도록 박사 과정을 개설하였고 소수 민족 학생들이 과학에 영입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어니스트 윌킨스 주니어의 영향과 의의

윌킨스는 60여 년 동안 대학이나 정부 주관 연구와 회사에서 수학자, 과학자, 공학자로 일하고 연구하면서 과학, 공학, 수학 저널에 100편 이상의 과학기술 보고서와 연구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특히 감마선과 차폐에 대한 연구는 항공우주산업이나 핵의학산업, 원자력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수학자들은 고급해석학, 고급기하학, 함수론에서 그의 수학적 이론들을 연구하며 발전시켜나가고 있습니다.